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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통 문학

불편한 동행

 

 

 

터미널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까만 얼굴의 촌로인 듯한 분이 보따리를 껴안고 내 옆에 앉으며 묻는다.

"춘천 가는 차 어디서 타지요?"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어르신 저도 춘천 차 기다리니까요!"
"아 그럼 같이 가면 되겠구먼?"
하시면서 내 옆에 앉는다.

순간 쓴웃음이 나왔다.
고속버스가 아니기 때문에 좌석 번호도 없어서 분명 내 옆자리에 앉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사색하듯 다녀올 여행이라 일부러 버스를 탔는데 출발부터 내키지 않는 타인의 간섭에 시달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난 재빨리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버스가 들어와 노인이 먼저 타기를 바라면서 손을 씻고, 커피를 사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잠시 후, 멀리서 슬쩍 바라보니 버스가 들어와 있어 차에 올랐더니
다행히 노인은 운전기사 뒷자리에 딱 자리를 잡고 계신다.

"저 운전기사 오늘 졸음운전할 일은 없겠구나"

안심하며 난 중간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고 보니 버스는 만원에 가까웠다.
그리고 버스가 출발하려는 순간 묘령의 여인이 숨 가쁘게 버스에 올라 한 번 쭉 흟터 본뒤 내 옆자리에 냉큼 몸을 던진다.
이런 것이 버스여행의 묘미일까?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옆자리 여인의 모습을 곁 눈질로 흘기면서 생각해본다.
어디까지 갈까?
춘천까지 가면 말이라 도 건네볼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띡띡띡 쉴세 없이 눌러대는 휴대폰 버튼 소리, 한술 더 떠 카톡, 카톡, 문자 오는 소리,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이런 경우를 보고 혹 떼려다 혹 붙인다고 하던가?
노인의 참견은 피했더니 그보다 더 시끄러운 소리에 화가 날 정도였다.
외모로 봐서는 다소 교양 있어 보이고 차림새 또한 천박하지 않음에 눈인사 한 번쯤 나누고도 싶었으나 이 동행자는 외모와는 달리 예의라고는 전혀 없는 여자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 자리에 앉은 학생도, 건너편에 앉은 아가씨도
심지어 기사분 뒤에 딱 붙어계신 노인도 뒤를 돌아 다.
난 볼멘소리가 목구멍까지 기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이어 폰을 귀에 꼽았다.
다행히 그 비 매너의 여인은 구리에서 내렸다.
두 시간을 소음에 시달리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고 차 창밖 북한강의 여유로움에서 다시금 마음에 평온함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소란스럽게 버스에 오르더니 그중 한 분이 좀 전 비 매너 여인을 대신해 내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시작된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또다시 시달림을 당했다.
늦게 탔기 때문에 이리저리 나누어져 앉은 아주머니들은 나름 쏙닥쏙닥 이야기를 하는데 멀리 앉은 일행들을 향한 이야기는 버스에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
이야기 인즉,
누군가 춘천에 사는 친정집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는 중이었다.
처음 가는 아주머니는 마냥 들떠서 신이 났는데, 관광버스가 아닌 게 아쉽기만 했던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미안했던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쉬쉬해 보지만 여전히 소란스럽더니 한 순간에 조용해진다.
그리고는 이내 나의 어깨에도 짓눌리는 무게감이 전해져 왔다.
엎친데 덮친다고 이 아주머니는 나의 귀를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어깨마저 무단으로 점령하고 코까지 곤다.
그런데 힐큼 쳐다보니 얼굴은 연신 웃으며 모처럼 일상 탈출의 기쁨에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래!까짖꺼 어깨 한 번 내어 주지 뭐 하고 어깨를 다시 새우며 생각해 본다.어떤 인연이 있어 이 동행자는 내 옆 자리에 앉아 , 처음 보는 외간 남자의 어깨를 베고 잠이 들었을까?
이 여인도 한 남자의 아내요 아이들의 어머니일 텐데 살림이 얼마나 고달프면 모처럼의 일탈에 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뉘일까?
생각하니 애잔한 심정에 아까 떠들던 모습까지 용서가 되는 것 같았다.
청평에 이르러 군인 몇을 내려주자 빈자리가 생겼고,
내 옆에 잠든 여인은 일행의 부름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신세 진 것을 알았는지 얼른 매무새를 바로 잡고 눈 인사를 건네며 일행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마도 내 어깨를 베고 30분을 잤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순간 어깨가 허전해졌다.
군인들이 내린 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얼마나 될까?
그러고 보면 내 어깨를 베고 잠이 들었던 저 여인은 천만번의 낯선 동행의 결과는 아닐런지,

"선생님 이거 한잔 드세요!"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린 여인이 흔들리는 버스 안을 위태롭게 걸어와 내 머리 위에 종이컵을 내민다.
따뜻한 유자의 상큼함이 창밖 북한강의 물결처럼 가슴에 잔잔한 여운을 퍼 트린다.
무슨 인연이던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휴대폰의 여인도 조금만 이해를 할걸......도로 옆 높이 서 있는 이정표가 어느덧 버스가 춘천에 들어왔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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