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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통 문학

여름날 한때

시골 산골짜기 기온이 한낮의 열기를 비웃듯 신선한 바람을 토해 낸다.
앞뒤 창문으로 신선한 바람 유유자적 거리고 뒤 뜰 산자락에 비둘기 쌍쌍 울어대니 저절로 행복에 겨워 뒤집히고 있다.
한때는 연구실적의 압박에 삼복더위에 물 구경도 못 하고 몇 날을 꼬박 포박을 당했던 시절도 있었거늘 살다 보니 이런 복에 겨운 날도 찾아오고 인생, 그야말로 피박에 독 박 쓰더라도 언젠가 오광에 쓰리고 칠 날 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인가 보다.유월임에도 더위는 연일 30도를 넘기며 한여름 가운데 있지만, 더위도 코로나도 이 곳에선 남의 나라 일 같이 여겨지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시원한 차 한 잔 들고 데크에 앉아 바람을 즐겨본다.
테라스에 널어놓은 빨래를 바라보며 마음마저 깨끗해져 옴에 머리가 맑아진다.
간밤의 짧은 비에 들이 더욱 짙푸른 생기를 보여준다.

 

아내는 유난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다.
그래서 배롱나무 아래 산자락 쪽 담장 옆에는 금 송화가고, 그 옆에는 비올라를 심었다.
대문 옆엔 능소화가 자릴 잡았고, 이것저것 예전에 아내가 하던 대로 따라서 심어 보았다.
하지만 꽃을 가꾸는 내공이 부족해서인지 아내가 심은 것만큼 예쁘게 자라주지를 않는다.
이놈들도 자신들을 어루만져주던 손길을 아는 것인 게다.
그래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게 채워져 가는 화단의 모습에 아내도 흐뭇한 모습으로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원 가운데를 차지한 반송 밑에는 상사화를 심었더니 잎이 푸짐하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집에 오는 손님마다 상사화는 집안에 심는 것이 아니라고 뽑아 버리라는 통에 또다시 불행이 찾아올까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점심을 먹고 햇빛이 사라진 틈을 타 산 아래 텃밭에 나가 보았다.
여기저기 희뿌연 물체들이 나타난다.
앙증스러웠던 긴 호박들이 날이 갈수록 커지더니 이제 온전히 제모습을 갖췄는데, 배시시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함박웃음을 짓는 것도 같고 어느 땐 와락 달려들 것 같은 작업성 자세 같기도 하다.그런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몇 개의 넝쿨이 뻗어 나가고 순박하기만 한 노란 꽃잎이 매달리는데 옆 산자락에서 내려온 칡넝쿨과 엉켜 뒤죽박죽 난리를 치고 있다.
칡넝쿨을 자르자니 이놈도 생명인데 안쓰럽고 그냥 놔두자니 질서가 안 잡혀 이리저리 궁리 끝에 서로 상생하게 앞서 뻗어 나가는 줄기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대충 순을 쳐내고 정리하는 중 얼굴에 착 감기는 불쾌한 느낌이 들어 둘러보니 거미줄 끝에 시커먼 놈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보고 있다.
넝쿨 정리하며 거미줄 치운 것에 성이 난 것인지,
기분도 더러운데 맞짱 한 번 뜨자며 궁둥이를 치켜들고 앞발을 이리저리 놀리며 기선 죽이기 시도를 한다.
최대한 인내와 아량으로 저리 가라 해도 무슨 깡다구인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별놈이 다 지겟다리 걸치고 제 구역 타령을 하고 있으니 슬슬 약이 올라 곁에 있던 빗자루를 집어 들고 제집을 허물어 대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그러나 공연한 객기에 놈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
살며시 빗자루로 놈을 떠받아 멀리 풀밭에 정착시켜 주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도 울고 갈 기하학의 각도와 구도로 지어진 빗방울 머금은 거미집을 모두 철거했다.

 


산자락 한편 개망초가 무성하다.
이름 앞에 개 자가 들어가도 절대 천박하지 않은 꽃.
여기저기 약속이나 한 듯 여름이면 흐트러지는 개망초가
여름 길 걸으며 계절의 순리를 받아들이듯 맘껏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이렇듯 자연도 계절의 순리와 더불어 질 때와 필 때를 어김없이 받아들이며 사는데
나는 어느덧 반세기를 넘기고 하늘의 뜻과 땅 밟고 산다는 지천명에서야
삶이라는 이치를 어슴푸레 깨우치며 산다.

 이제 큰 것보다 작은 것들을 감사히 여길 줄 아는 나이를 세고 싶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았음을 아쉬워하기보다 황금색 벼 이삭이 되었음을 감사히 여기는 삶이 되고 싶다.
지천명 여름의 길목에서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임을 마음의 갈피에 끼우고 살아야겠다.
해가 바뀌어 봄인가 했더니 눈 깜짝할 새 여름꽃들이 만개했계곡 물소리에는 한층 더 청량감이 들어있다.
뒤 뜰의 감나무와 살구나무도 어느덧 열매를 틔우고 뒷산 밤나무마저 꽃의 묘한 냄새를 지우고 앙증스러운 가시가 돋아나는 계절,
이렇듯 또다시 계절은 순환되고 모든 만물이 제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초록으로 넘치는 때,
이제 주변에 스쳐 가는 사물들 하나도 가벼이 보지 말아야겠다.
나에겐 이렇게 끊임없이 흔들어주는 계절 바람이 있으니까,

점심은 찬밥에, 텃밭의 상추로 호강을 해야겠다.
싱그러운 또 한 자락의 바람이 뜰 안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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