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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이야기/사는이야기

은퇴 그 후.....

불교 언어에 公案(공안)이란 것이 있다.

이른바 화두와 같은 것인데 “부처가 무엇인고?” 물었는데 “뜰 안의 잣나무요!”라는 식의 다소 동문서답 같은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주로 일화 등을 빌어서 화두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요즘 나의 화두는 “사는 게 무엇인가”이다 누군가 이런 화두를 내게 던진다면 나는 다소 엉뚱하게 “죽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뜬금없지만 나의 화두 속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물론 신체적 죽음이 아닌 정신적인 몰락 즉, 죽어버린 내 정신세계를 말함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여 네 시간, 그리고 점심 식사 후의 네 시간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리듬의 삶,이 행로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부여되는 의무이기에 대개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수행해가며 산다.

그런데 이런 정상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타인과 동 떨어진 삶을 살아 나갈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이런 화두를 던져보게 된다.

 

잠결에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의미 없는 서핑도 하고 글 쓴다고 자판 두드리다 안 오는 잠 억지로 불려 들여 겨우 잠들었는데 조그만 소리에도 눈이 떠지는 걸 보니 불규칙한 생활이 이제 정리가 되어가는가 보다.

 

몇 년 전 27년 동안 몸담고 있었던 직장에서 명퇴를 했다.

정부 산하 기관이라 나의 위치도 굳건히 되어갈 무렵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속에서 사표를 냈다.

아내의 병시중을 위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지만 한동안 무기력감 뒤에 느껴지는 우울증으로 몹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퇴 일여 년만에 아내가 떠나고 그 뒤 찾아오는 방황과 정신적 고통은 나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또다시 1년여를 전국 각지를 떠돌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망각.

인간에게서 이보다 더 큰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있을까?

시간이 흐름에 나 또한 머릿속 상처들이 조금씩 비워져 가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에는 그동안의 삶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눈과, 입과, 귀는 서서히 그동안 겪지 못하고 살았던 화려함을 쫏고 있었다.

두 아이들 또한 모두 성인이 되어 사회인으로 인정받으며 자신들의 앞은 하고 살기에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할 수 있는 요인이 없었다.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에 가슴 한구석에서는 은근히 새로운 삶에 대한 희열도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었다.

동가식 서가숙,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며 오로지 나만을 위한 삶에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다행히 30여 년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기에 물질적 어려움은 없었고 매달 나오는 연금 덕에 하루하루 나에 대한 보상을 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되었다.

은퇴 5년 일과 가족 그리고 성실과 책임감으로 무장되어 있던 나의 몸과 정신은 어느덧 게으름과 피폐함의 무감각이 점령했고 점점 나태의 나락으로 빠져만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은 한참 일할 나이인데 무료하지 않냐고?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좀 놀고 살아도 되지 않냐고.

나 스스로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옹호하며 나의 게으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마냥 즐거울 것만 같았던 놀고먹는 삶도 증으로 다가오고 나는 또다시 처음의 그때처럼 무기력감과 우울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하릴없는 오후 점심을 먹고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리모컨만 만지작 거리다 춘곤증의 나른함에 이마에 팔을 얹고 천정을 바라보는데 귓전을 울리는 손목시계의 째깍거림, 순간 머리를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게으름으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순간에도 시게바늘은 쉼 없이 시간을 아먹고 있었고 내 인생도 그렇게 무의미하게 세월을 축 내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살아갈 날언제까지 이렇게 무의미하게 인생을 허비하며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문득 스첫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찾아 나섰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에 내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 선택되는 위치에 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또다시 나 자신의 무능함으로 하루하루가 버겁게 다가오고...

끝내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자라는 안일함이 가슴에 굳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중요함을 잃어버리고 낮과 밤이 바뀐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 무엇에도 의욕이 일지를 않았고 날로 나의 정신적 피폐함은 무성한 가을 낙엽 쌓이듯 두꺼워져만 같다.

심한 게으름이라는 병이 들고 말았다. 몸과 정신세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병은 게으름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내가 세상에 아직 살아있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찾아 게으름으로 인해 나 자신은 점점 사회 구성원 속에서, 또는 나의 주위 모든 사람들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 사람이 되어가는 게 가슴 아픔으로 다가와 정신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아침, 주방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때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남들이 말하는 아직은 청춘인데...

내 나이가 그들이 말하는 청춘인지는 나 자신도 가늠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아직은 무언가 해도 늦지 않은 나이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벌떡 일어나 내 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손금들 사이에 자리 잡은 세월 속 주름진 틈새마다 삶의 흔적들이 박혀 있었다.

그 흔적이 무수한 삶의 틈 바구니 속으로 다시금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혼밥, 혼술로 견뎌 왔던 은퇴 후의 나날들..

비록 예전 삶 속에 다시 뒤엉키지는 못하겠지만 다시금 머릿속을 치열함으로 채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어느 순간 오로지 나만 위해 살자던 내 마음도 이제 누군가와 기대며 얽히고설킨 인생의 왁자지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다.

다시금 휴대폰 속의 지워졌던 이름들이 날이 갈수록 하나둘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고 잊혔던 치열한 삶 속에서의 내 인생 추억 한 귀퉁이에 다시 나를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재직 때 했던 업무가 조금씩 일감으로 들어왔고 열정적이었던 한때를 기억했던 나의 머릿속도 지식의 틈새를 찾아  가끔이지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일조했다.

 

내가 앞서 언급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병이 게으름이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나태하고 게을러지면 나의 기억 속에서 타인들의 존재도 지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의 존재를 하나둘 지워가는 이 게으름은 나의 존재 조차 지워버리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도 상실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적당히 물들고 적당히 악다구니 쓰고 살아야 비로소 삶의 가치가 돋보이는 게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은 자신의 할 탓 이기에 삶의 행복, 불행을 결정짓는 것도 나 외에는 그 누구도 해 줄 수 없다는 게 진리라는 걸 걸 참 늦게도 깨닫고 사는 요즘의 나날 들이다.

 

은퇴 후 몇 년, 방황과 정신적 죽음을 겪으며 살았지만 지금 그러나 내 인생에 오점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무모하게 치킨집과, 편의점과 커피숖을 한다며, 직장 생활을 하 축적 해 놓은 노력의 결실을 잃지 않았고 끊임없는 자아 성찰의 기회로 삼으려 고독과 외로움과의 투쟁을 벌이며 나 자신 또 다른 행복한 삶의 방향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니..

 

이제. 지금까지의 삶은 한낱 추억 속에만 존재할 것이고 비록 살아 만큼의 세월은 못 되지만 남은 인생 공안이라는 화두를 던져 묻는다면

 

“사는 게 무엇이더냐?‘

”사는 건 죽는 것이다 “

다시 말하고 싶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가 바뀐 행복에 겨워 죽는 것이다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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