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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이야기/사는이야기

파마하고 기인이 됐다

 

 

샤워하고 거울을 보니 웬 기인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카락의 자라는 속도가 미용실을 한 달만 걸러도 귀를 덮어버리고

게다가 듬성듬성 돋아난 흰 머리카락까지 가세해 볼썽사나운 꼴로 변해 버린다.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미용실을 찾았다.

그런데,

“선생님 염색과 파마를 한번 해 보세요 훨씬 젊어 보일 거예요”


순간,파마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잠시 고민했다.

파마머리가 어울릴까 걱정도 앞서고 해서,


어느덧, 내 머리카락도 젊음을 위장할 때가 되었나 보다.

젊어진다는 말로 유혹하며 염색과 파마를 권유받을 나이가 되었나 보다.

그동안 애써 태연한 척 나이 들어서 나오는 흰머리가 아니고 새치임을 강조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새치라고 우기기에는 겨울철 흰 눈을 뒤집어쓴 것 같은 머리카락이 인정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디자이너의 권유에 흔쾌히 파마와 염색을 하마 승낙했다.
어쩌면 젊어 보인다는 꾐에 넘어가 버린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내 나이가 젊다는 형용사로 표현되던 것이 이제는 젊어 보인다는 동사가 하나가 더 나이처럼 붙어 버렸다.
또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나이 먹었음을 시인하는 자조 석인 말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운전하다 길을 못 찾을 때도 그리고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못 시킬 때도 어김없이 뒤에 붙어 다니는 

"이젠 늙었나 봐 "

종일 경로당 장기판에 코 박고 "장이야"를 외치는 열로 한 어른들이 이 나이에 늙었다고 하면 꾸중을 듣겠지만 그래도 매년 다르게 와닿는 모든 것이 나이 먹고 있음을 실감 나게 한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미장원을 가기 전보다 더 희한한 기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생긴 대로 살지 머리 모양 바뀐다고 얼마나 더 젊어 보이겠다고….

후회가 밀려왔다.

당장 달려가 파마를 풀고 원상복구를 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왕에 비싼 돈 들였는데 참기로 했다.

디자이너의 말에 의하면 

 

"당장은 꼬불꼬불해서 보기 안 좋지만, 머리카락이 더 길고 파마가 자리 잡으면 멋있을 거예요"

 

라는 말만 귀에 메아리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모양과 색깔 바꾸어 젊게 보이고 싶은 허황한 욕망에 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을 위안 삼으며 어차피 세월을 앞세워 보낼 수 없다면, 같이 가야 한다는 순리를 저버릴 수없다면 좀 더 천천히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늙어도 맛있게 아름답게 늙는 것이다. 

 


 

파마하고 달포가 지났다.

샤워하고 머리를 말린 뒤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거울 속 기인은 어디 가고 몇 년은 젊어진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디자이너 말에 속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젊어 보인다는 동사 하나를 떼 버린 것 같은 더 큰 착각에 빠져들었다.

머리 스타일만 바꿔도 10년은 젊어진다는 말이 어불성설 같겠지만

나이 먹어도 늙어 보이지 않는다면 나이 값하지 않고 꼰대가 아닌 품위 있는 중년을 살게 될 것이니 더욱 

아름다운 삶을 이끌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머리카락의 변신은 무죄가 아닌 세월을 거스르는 신의 영역에 도전했으므로 유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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