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는이야기/사는이야기

다시 시작한 사랑

봄이건만 여름 더위가 괘씸하게 느껴지는 오월 초순
미친년 널뛰듯 오늘은 또 쌀쌀함을 갖췄다.
비까지 동반한 봄인 듯 봄 같지 않은 날에
그녀와 재래시장을 찾았다.
얼갈이 배추와 열무 몇 단 그리고 시장 표 수 제빵 두 봉
비 내리는 시장 바닥을 걷다 보니 바짓가랑이 까지 흠뻑 젖어 발걸음이 불편했지만 비는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가깝게 어깨를 마주하고 걸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녀의 집에 마주앉아 사 온 채소를 손질하는 손길에 새록새록 푸근한 정이 쌓이고 비로소 봄의 포근함이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고 숨이 죽은 배추를 보며
나 또한 그녀의 마음속에서 소금에 절여져 남은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부드럽고 적당한 간수가 베인 배추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배추 몇 포기 열무 한 단에도 사람 간의 사이를 좁혀주는 매개체가 되네 다는 걸 지천명을 지나온 나이에 깨닫고 사는 요즘이다.

결혼 27년 차 되던 해 아내가 암 덩어리 하나 몸에 껴안고 세상을 떠났다.
긴 인생의 연극 한 편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즈음,
행복한 결말로 막을 내릴 줄 알았던 내 인생 연극은
막장 드라마의 그것처럼 후반기에 
우리 부부를 시기하던 사람들에게  반전의 묘미를 선사했다.
충격과 먼저 떠난 것에 대한 배신감에 나 자신을 학대하고 방황 속에 하루하루 연명한 지 오 년여 세월,
인생이 너무 허망하여 또 다른 삶으로 위안 삼으려 나를 내려놓고 이것저것 취미 생활에 마음 부치며 무던히 애써 보았지만 스스로 갇혀버린 고정된 삶의 올가미는 나 자신을 풀어 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세상 사람들 모두 젊다고 말하는 나이인데 그냥 이대로 고독한 삶을 살기에는 자신의 젊음이 어이없기만 했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시기임에도 무언가 정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아까운 세월을 야금야금 갈아 먹고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마지막을 어떻게 맺을 것인가?
여러 가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날들이었다.
귀에는 무언의 속삭임에 어둠 속으로 달려 가고 싶은 충동의 벌레들이 끊임없이 윙윙 거렸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망각의 특효약이란 걸 머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차츰차츰 나를 찾아가며 사는 날 속에 문득 가슴속에 사랑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젊은 시절의 풋풋한 사랑과는 딴 세상의 환각이었었다.
완숙함 속에 느껴지는 사랑, 
어쩜 젊은 시절의 그것보다 더욱 유치하고 나이 들음을 잊게 하는 또 다른 세계 속으로의 비행이었다.
더불어 마음속 한 쪽에 자리 잡은 알지 못할 두려움은 살 만큼 살아온 삶의 경력으로도 쉽게 퇴치할 수 없는 혼란으로 다가와 나를 고뇌하게 했다.
각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생활 방식과 그 삶 속에서 익숙해진 습관으로 고장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혹은,나름 세월의 연륜과 경험으로 서로의 자존심에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
여러 가지 번뇌가 사랑, 그 옆에 바짝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사랑
주의의 시선도, 가족들의 생각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남은 인생을 오롯이 행복으로 점철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곤 했다.

그러나
이미 가슴속 속속들이 사랑이라는 가슴 울림에 돌이킬 수 없는 늦은 사랑은
어떠한 힘듦이 오더라도 극복하고 지금 사랑이 막사랑 이라 넌지시 나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그 사람

우연인 듯 필연적으로 내 앞에 나타나 중년의 늦깎이 삶에 불씨를 지핀 그 사람
고뇌하는 마음도, 걱정하는 마음도 그녀를 보면 부풀어 오른 비눗방울 터지듯 찰나에 사라져 없어지고
순간의 행복과 가슴 설렘에 터지지 않는 또한 비눗방울 처람 마음은 가벼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닌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랑이란 것, 절대 만만하지 않지만 또한 가장 쉽게 해야 한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가슴속 그윽함으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치한 시간을 채우고 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인생의 행복함으로 가는 처음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 나이도 있는데 그냥 같이 살까?"
나의 어이없는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글쎄!
이 나이에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까?
그럼 한 1년 정도 기다려 줄 수 있다면 생각해 볼게"

그리고 얼마후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


"프러포즈느.얼마전에 했지?
이건 그냥..."

오십을 훌쩍 뛰어넘은 중년 사랑의 시작이었다
유치하기가 짝이 없는...


봄의 끝 무렵, 
장 보러 가는 길에 장대 같은 비가 내리는 날
작은 우산을 최대한 그녀의 쪽으로 기울이며 걷다 보니 오롯이 비는 내 차지가 되었지만 
우산 위로 투 두둑...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청아한 실로폰 소리처럼 가슴에 찐한 울림으로 다가와
새로운 삶을 알려주는 시그널이 되었다

'노는이야기 > 사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마하고 기인이 됐다  (0) 2020.07.03
은퇴 그 후.....  (0) 2020.05.24